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침공 (문단 편집) === 영국의 입장 === [[영국]]은 본래 1920년대에는 독일에 동정적인 입장으로, 프랑스 대독 정책을 지나친 것이라고 비난하곤 했다. 이는 프랑스의 대독 노선을 수세적, 즉 앞에서 언급된 타국의 희생을 전제[* 결과적으로 희생되었다는 것이지 프랑스가 동맹 체결 시점부터 체코, 폴란드가 침공당하는 것을 방기할 생각은 아니었다.]한 동맹 체결이 남발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같은 연합국인 만큼 영국은 당시 상대적으로 친독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대독 포위망의 일종의 보증인같은 것이 되버린다. 영국은 이를 영 달갑지 않게 생각했고, 심지어 프랑스가 1939년 2월 동맹국인 체코가 합병 당하는 것을 보며 체코를 희생시키지 않았으면 더 큰 피해를 입을 뻔 했다며 안도하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영국은 당시 세계 최강국을 자처하는 만큼 국민적인 자긍심도 강했다. 그 동안 불쌍하다고 여겼던 독일이 1938년 합의를 어기고 체코를 홀라당 먹어버리자, 프랑스와 달리 영국에서는 약속을 어겼다며 일단 국민적으로 격분했다. 이에 아무리 정부가 유화정책을 추구하고 싶어도 다음 총선에서 지기 싫으면 반독 노선으로 갈아탈 수밖에 없게 되었고, 폴란드 침공이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은 프랑스에 강력한 외교적 압박을 넣어 선전포고를 선언하게 만든다. 영국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지금까지 프랑스의 고집에 질질 끌려간 경향도 없지 않았으므로 일을 여기까지 키운 빚을 받는다는 속셈도 있었고, 영국이 보기에 독일은 프랑스 없이 혼자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영국의 육군 수준이 빈약한 것에 있다. 영국군은 전통적으로 [[모병제]]에 기반한 소규모 군대이기 때문에 프랑스처럼 대규모 육군을 단기간에 확보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 영국은 독일이 프랑스에 준하는 육/공군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였고, 따라서 전쟁의 결정적 향배는 영국이 얼마나 더 많은 병력을 유럽에 보내느냐에 판가름나리라 생각했다. 이에 영국은 서둘러 본토에서만 200만, 영연방 국가에는 최종적으로 약 500만 이상 병력의 소집 준비를 한다. 이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언젠가 프랑스군에 버금가는 강군이 되어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보였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영국의 위상, 자원, 경제력은 세계적인 수준이었고, 프랑스가 독일을 막는 동안 상대적으로 안전한 후방에서 군대를 육성, 지원한다는 계획은 현실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당장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였고,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때처럼 [[영국 원정군|영국 원정군(BEF)]]을 프랑스로 파견한다. 그러나 영국이 당장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은 한정되어 있었고, 1차대전 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10개 사단 규모의 BEF를 6대 고트 백작 존 베레커의 지휘 아래 유럽으로 보내 프랑스군의 좌익에 배치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이 BEF는 당시 영국군이 가지고 있었던 정규군의 절반 이상이며, 제대로 훈련을 마치고 중장비까지도 갖춘 병력의 전부였다.[* 이 중 2개 사단은 아직 완편이 아닌 상태였다.] 만약 이들이 사라지면 영국은 육군을 다시 무에서부터 건설해야 했다. 과거 1차 대전에는 BEF는 소극적으로 행동하다가 동맹군에게 불신을 사는 경험을 했는데[* 1차대전 당시 영국군은 일관되게 프랑스 제5군의 측면을 엄호해야 했지만, 영국군은 결국 1914년 9월 [[마른 전투]] 때까지 충분한 엄호를 제공하지 못한 채 후퇴를 거듭했다. 사실 그때 영국군이 프랑스군처럼 적극적으로 싸웠다면 더 일찍 프랑스가 망했겠지만, 그래도 영국이 자군의 안위을 도모하다가 동맹의 신의를 저버릴 뻔했다 것은 사실이다.] 이로 인해 2차대전의 BEF는 더 적극적으로 주어진 임무를 이행하기로 결정, 영국은 그나마 지난 전쟁보다 더 선진적이고 잘 무장된 육군을 유럽에 투입하게 된다. 그러나 1개 전역을 담당할 정도로 독자적인 작전 수행 능력은 없었고, 어디까지나 프랑스군의 일원으로서 전선 방어를 맡은 1개 야전군에 그쳤다. 한편 영국 공군의 경우, 당시 독일을 제외하면 유럽에서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공군이며 또한 제대로 된 전략 폭격 교리를 가진 유일한 전략 공군이었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자 영국 공군은 독일에 대한 전략 폭격 임무를 맡지만, 당시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는 유의미한 결과를 내기엔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몇 차례 산발적인 공습은 있었으나 전단지 살포 이상의 실질적인 활동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추축국과 연합국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각자 나름대로 전쟁준비를 마친 끝에 운명의 1940년 5월 10일을 맞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